[쉬어가면서]1인 금쪽이의 해결사, 오은영 박사님은 초중고 담임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나?

학생, 선생님, 학부모 등 모두를 만족시키는 교육이 가능할까?

국회 교육위와 정부가 노력하여 6월 12일 의결한 법률로 현장에 있는 교원이 얼만큼 만족할지 모르지만 현재 익명의 블라인드에 어느 선생님이 게재한 내용을 보면 학교 현장의 심각한 상황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 아래 내용은 수정없이 각종 게시판에서 이슈되고 있는 글이다. 선생님 답게 문장이 좋아 긴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읽는데 불편함이 없다. 읽는 동안 우리나라 교육현장의 어려움을 다시한번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아래 내용은 블라인드 게시판 게재된 전문이다.


교직 경력이 10년을 바라보는데, 나는 점점 더 무능해지고 있다.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그러니까 불과 8-9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 땐 선을 넘는 학생들을 호되게 야단치기도 하고, 숙제를 하지 않은 아이들을 남겨 숙제를 시킬 수도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선생님, 저 학원에 가야 하는데요."라는 말을 하면, "그러게 숙제를 해 왔음 됐잖니. 얼른 하고 가렴."이라고 말하고, 그 애 부모님께 '아이가 숙제를 다 한 후 하교시키겠다'고 통보할 수도 있었다. 그럼 그 때까지만 해도, 죄송하다, 알겠다고 하는 부모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어느샌가부터 오은영 박사의 말들이 '육아의 바이블'이 되면서 모든 아이는 무조건적으로 이해받아야 하고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가 됐다.

그녀는 아이의 행복과 안정감, 건강한 성장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 학대라고 말한다. 진의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학부모들은 저 말을 텍스트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학교는 아동학대의 온상이 되었다. (어떻게 한 전문가의 의견을 종교처럼 맹신하는지, 신기하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원치 않는 행동을 하도록 하고, 친구와 갈등이 생겼을 때 서로 양보하게 하고, 나쁜 행동에 대해 지도하고 반성하게 하는 모든 순간은 말하자면 학대다. 특히, 신체도 아닌 '정서적 학대'를 들이밀면 교사는 힘이 탁 풀린다. 나는 '교육'을 했으나 그 애가 듣기에 그게 고깝게 느껴졌다는데 뭐 어쩌겠나. 그러니 고소를 해도 잃을 것이 없는 학부모는 '아님 말고' 정신으로 신나게 고소를 남발한다.

친구를 때린 아이를 혼내는 것은 아이를 불안하게 할 지어니, 지금의 학부모는 '남의 자식을 때린 내 자녀를 똑바로 교육시키겠다'라고 하기보다 '아니, 우리 애가 때리긴 했는데, 그 애도 놀렸다잖아요. 우리 애 얘긴 들어보셨어요? 우리 애가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아세요?'부터 나온다. 놀린 친구도 똑같이 엄히 지도했음을 아무리 설명해도 억울해 한다. 제 아이의 감정과 행복이 너무 중요한 나머지 다른 집 아이도 똑같이 귀한 자식이란 걸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끼리 싸운 후에, "선생님, 쟤도 했는데요."부터 튀어 나오는 13살짜리 초등학생과 놀라우리만큼 수준이 똑같다.

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시키면 아이의 행복을 저해할 것이므로, 학부모는 '선생님, 어제 우리 아이가 피곤해서 일찍 잠들어 숙제를 못했는데 혼내지 말아주세요.'라는 문자를 당당하게 보낸다.

나는 매년 학부모 총회 때마다, '아이이므로 당연히 잘못을 한다. 담임으로서 나는 아이가 자기의 행동에 적절한 책임을 질 수 있게 가르칠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로, 아이는 당연히 지각을 할 수 있으나 나에게 잔소리 한 마디 쯤은 들어야 하고, 숙제를 못해올 수 있으나 쉬는 시간에 자리에 앉아 숙제를 해내야 하며, 실내화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물티슈로 운동화 밑창을 박박 닦고 교실에 들어오는 수고 정도는 감수해야 하고,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친구에게 부탁해서 빌리는 번거로움 정도는 겪어야 한다. 나는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책임을 지도록 하나, 변명조차 제 입으로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은 기어코 부모의 입을 빌리고, 부모는 기어이 아이의 '비빌 언덕'이 되어 줌으로써 아이의 성장을 방해한다.

요즘은 대학교에도, 직장에도 본인 대신 부모가 전화를 해서 불만을 토로한다고 하는데, 고백하자면 그 진상의 씨앗은 학교에서부터 무럭무럭 키웠음을 알리는 바이며, 이제 몇 십 년이 지나면 사원 엄마와 대리 엄마와 부장 엄마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대리전을 펼칠 것임을 확언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자면 앞으로는 뻔뻔하고 목소리 큰 부모의 자식이 최고의 대접을 받게 될 것이므로 자기계발을 하는 대신 각자의 부모님께 발성법을 가르쳐 드릴 것을 권한다.

학교 급식에서 먹고 싶은 메뉴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방해할 것이므로, 지금의 학부모는 '급식에 생선 대신 고기를 넣어달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너무 매워서라면, 영양소 균형이 안 맞아서라면 얼마든지 이해한다. 수백명이 먹는 단체급식을, 순전히 자기 자식의 기호에 따라 입맛대로 바꾸려는 시도 자체가 우습다. 이런 어이없는 민원에 "아 네, 그 요구는 못 들어드리겠는데 도시락을 싸서 보내시던가 홈스쿨링 시키시겠어요?"라고 말하고 그 날로 교직을 때려치우는 게 내 마지막 소원이다.

귀하게 자라 교실에 앉아 있는 스무 명 남짓의 아이들은 저마다 소황제다. 철저히 본인만 귀해서 어떤 학부모는 하다하다 자기 애가 원하지 않는 친구와 같은 모둠이 됐다는 이유로 '울면서' 나에게 역정을 냈다. 그게 도대체 왜 울 일인가. 내 자식이 그랬다면 나는 아이에게 "모둠은 무작위로 정해진 거니까 그 애가 너한테 폭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면 불편한 아이랑 어울리는 법도 배워봐야지."라고 말했을 거고, 그럼에도 아이가 떼를 쓴다면 "네가 정 그 애랑 같은 모둠이 되기 싫다면 네가 직접 선생님께 말씀 드려."라고 말했을 거다. (학생과 부모에 따르면 학교폭력은 전혀 없었고, 본인이 '꼭' 하고 싶은 걸 그 친구가 원치 않는다는 게 모둠교체를 원하는 이유였다)

이처럼 '일부' 부모들은 자기 애가 상처받는 것을 도무지 참지 못하고 아이가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모든 순간을 극도로 회피하니 교사들은 점점 아이들에게 할 말을 참게 된다. '맘대로 해라. 넌 그래봤자 내 자식이 아니야.'를 속으로 되뇌이며 심기나 거스르지 않고자 애를 쓴다. 나는 상술한 아이의 모둠을 두 말 않고 그 애가 원하는 모둠으로 바꿔주었고, 그 해가 다 갈 때까지 그 둘을 같은 분단에조차 배치하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에겐 모둠원을 바꾸는 사정을 구구절절 돌려 말하며, 그 애 때문에 모둠을 조정했다는 걸 숨겨주기 위해 거짓말까지 해댔다. 부모가 아이의 성장을 포기하겠다는데 굳이 내가 부모를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너는 평생 부모의 바람대로 네 입맛에 맞는 사람들이랑만 살렴.' 그게 다였다. 그 애는 이 일로,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걸 배웠을 거다. 다음 해의 담임선생님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아이들은 갈수록 손해를 참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분노를 터뜨리며, 공동생활의 규칙 앞에서 "그냥 하기 싫은데요."를 떳떳하게 표현한다. 심지어, 고민 해결 시간에 '학원에 가기 싫어서 엄마랑 자꾸 싸운다'는 친구의 고민을 듣고, 어떤 아이는 '학원에 억지로 보내는 건 아동학대이니 너네 엄마를 경찰에 신고하라'는 해결책을 내놨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실화다. 가진 것이 권리밖에 없는 아이들은 이렇게나 방만하게 큰다. 현재 교사가 빠져 있는 아동학대의 구렁텅이에 곧 부모들도 빠지고 말 거다. 미안하지만 환영하는 바다.

미디어와 부모가 만든 강퍅한 아이들로 세상은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으므로, 나는 해가 지날수록 이 나라는 그냥 망해버리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한다. 이 아이들이 이 상태로 어른이 되면 모두가 미쳐버릴 게 뻔하니까. 그리고 미쳐버릴 세상의 예고편에 살고 있는 나는 세상보다 한 발 더 앞서 미쳐버렸다.

오늘 수업은 엉망진창이었다.

4학년 아이들이 교과수업을 들으러 교과실로 들어왔다. 몇몇 아이들은 손에 큐브를 쥐고 있었다. 큐브는 수업시간에 필요하지 않은 장난감이므로, 가지고 오지 말 것을 3월부터 매 시간 이야기했다. 매 시간 얘기했단 것은, 매 시간 그걸 가지고 오는 아이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정확히 네 달 째 나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은 정확히 네 달 째 그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영어 시간에 큐브 가지고 오지 마세요."라고 얘기하고 큐브를 교탁 위로 가져갔다. '서랍 속에 넣으라'는 지시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은 초저녁에 알아버렸기에 빠르게 내린 결정이었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마이크에 대고 "교과서 66쪽을 펴세요."를 10번 이상 말했으나 절반 가량이 책을 펴지 않았고, 뒤를 보고 떠들었다. 결국 한 명 한 명 지적하며 교과서를 펴라고 지시했다. 한 아이와 대화하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떠들었다. 처음부터 내 말을 듣고 교과서를 편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아니, 민망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은 그 이후로도 내가 지시사항을 말할 때 한 번에 듣는 법이 없었다. 나는 기가 막혀 마이크를 내려 놓고 아이들을 응시했다. 아이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 떠들었다. 내 표정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예의가 무엇인지 안다면, 하다못해 눈치라도 있다면 친구를 조용히 시키고 본인도 조용히 내 눈치를 살펴야 했지만 아이들은 5분 가까이 멈추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5분 가까이 선생님의 얼굴조차 살피지 않았거나, 살폈어도 아무렇지 않았다는 의미다. 결국 내가 제지했다.

그 순간 한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OO랑 OO랑 OO랑 자리 바꿔 앉았는데요." 너무 화가 나면 손이 떨린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정해 준 자리를 마음대로 바꿔 앉을 때마다 그러지 말라고 지도했었기 때문이다. 교과전담으로서 가르치는 아이들이 250명이 넘는 데다, 좌석표가 있긴 하나 매 시간 아이들이 제자리에 앉아있는지 파악하기는 무리였다. 아이들은 그 틈을 기어코 비집었다. 화가 났으나 화를 내면 안 되었다. 기본적인 규칙은 지키라며,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히죽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그 애들은 내가 정색을 하고 생활지도를 할 때마다 웃는다. 10살짜리 애들이 날 비웃을 때의 기분이 어떤지는 겪어보면 안다.

잠시 후, "선생님. OO가 씨발이라고 했어요." 한 아이가 어쩐지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욕했니?"
"안했는데요."
"했잖아!"
여기서 난 뭘 할 수 있었을까. 당신이라면 뭘 할 수 있을까. "그래, 안했음 다행인거고 했더라도 자기 인생이니까."

나는 조용히 중얼거리고 지도를 포기했다. 큐브 가지고 오지 마세요, 교과서 펴세요, 조용히 하세요, 자리 원래대로 돌아가세요, 뒤돌아보지 마세요. 수업은 내내 쓸데없는 지시로 가득 찼다.

나는 수업을 하지 못했고 아이들은 수업을 듣지 않았으니 그 공간에서 제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 시계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반은 수업태도가 너무 좋지 않아 모둠활동과 게임활동을 당분간 하지 않기로 한 반이었다. 모둠활동을 시킬 때마다 모둠을 넘나들며 자기들끼리 장난을 쳤고, 몇몇 평범한 아이들이 그 사실을 나에게 얘기하여 그걸 지도하는 내내 나는 감당하기 힘든 모욕감을 느꼈다.

"너 1모둠인데 왜 5모둠에 갔니?"라고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으면, 혼나러 나온 아이는 이기죽거리며 "아니요오~ 쟤가요오~ 저는 그냥~ 그 손에 전기 통하는 거 하러 갔는데요 ㅎㅎ"하고 말도 안되는 소릴 해댔다.

"지금 모둠활동 시간인데 그 행동이 맞다고 생각하니?"라고 물으면 그 아이는 대답도 없이 히죽히죽 웃었다. 나는 그 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갈 때까지 그 애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이들의 행동에는 몽땅 다 이유가 있으므로 그들은 이해받아야만 하고, 25명을 동시에 가르쳐야 하는 선생 따위가 할 수 있는 건 더이상 없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아이들은 점차 통제를 벗어났다. 모둠활동과 게임활동을 하지 않기 위해 그 반의 수업을 따로 준비해야 하는 지경이었으나 나는 차라리 그 편을 택했다. 더 이상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강의식 수업은 아이들의 집중을 요했다. 그 아이들은 집중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었으므로 나는 더더욱 수렁에 빠졌다. 나는 아이들을 쳐다보지 않는 것을 택했다. 쳐다보는 게 괴로웠다. 친구들이 고성을 지르고 깔깔거릴 때마다 짜증스럽게 인상을 쓰는 보통의 아이들을 마주할 면목이 없었다. 나는 컴퓨터 화면만을 보면서, "따라합시다." "적어 보세요." "답을 얘기해 볼까요?"만 기계처럼 반복했다. 따라하든 말든, 적든 말든, 모든 것을 포기했다. 나는 자꾸 시계를 봤다. 이제 시계마저도 미쳐버린 걸까, 내 무능을 마주하는 시간은 영 흐르질 못하고 발 밑에 고였다.

그러나 아무리 내새끼가 아니더라도 직업적 의무와 도리라는 게 있었다. 마이크를 든 나보다 더 큰 소리로 떠드는 아이들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얘기했다.

"얘들아. 수업 듣기 싫으면 안 들어도 되는데, 수업 듣는 친구들도 있잖아. 최소한 방해는 안해야 하는 거 아니니?" 11살짜리 아이들에게 빌었다. 통하지 않는 대사다. 이미 여러 번 써먹었고 무효했다.

"너네, 떠들거면 나가서 떠들고 와. 할 말 있으면 나가서 하고 와. 괜찮아."

아, 참고 참던 나는 결국 아동학대를 저지르고 말았다. 교실에서 나가라니. 아이의 다리를 아프게 하고 아이의 행복감을 저해하고 아이의 학습권을 박탈하는 말을 내 입으로 내뱉다니. 그러나 그 애가 나가주지 않은 것을,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가 이 사실을 부모에게 내뱉는 순간, 나는 인터넷 기사에 '교사 A씨'로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될 거였다.

나는 정확히 교과서에 담긴 내용만을 가르치고(가르쳐진 줄은 모르겠다), 아이들을 교실로 돌려 보냈다. 그 애들은 교실을 들고 나면서 인사조차 해 본 적이 없으나, 나는 "어른 보면 인사해야지."라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줄 힘이 없어 컴퓨터 화면만을 응시했다. 다른 반 아이들과는 신나게 인사를 하고, 게임을 하고, 농담을 주고 받고, 발표를 시키고, 기분 좋게 뽀로로 비타민을 나눠주었으나 그 모든 시간이 이 반엔 없었다.

배우지 않으려는 학생을 가르칠 권한이 나에겐 없다. 다른 친구들을 방해하는 학생들을 제재할 권한이 나에게 없다. 이것은 정말 나의 무능일까.

나는 오은영 박사에게, 당신이 만든, 스물이 넘는 소황제를 거느리고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으면서 '교육'을 하는 게 가능한지 묻고 싶다. 답을 구한다. 오은영 박사의 교육, 아니 치료는 철저히 1인용이다. 그 애가 세상을 혼자 살 거라면 그 애의 모든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마음 구석구석을 어루만져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사회는 그렇지 않다. 그 애는 어떻게든 사회 속에서 같이 살아가야 한다. 금쪽이들의 마음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만 귀한 자식이 아니다. 모든 아이들이 귀하다.

학교 선생은 스무 명 이상을 동시에 교육하고 있고, 동시에 아무런 권한도 없다. 한정된 시간, 한정된 공간 속에서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는 나머지 아이들 역시 나에게 똑같이 소중하다.

그러니 바라건대, 부모들은 오은영 박사가 아픈 아이를 '치료'하는 방법을 교육기관에 요구하지 않길 바란다. 그런 밀착 일대일 케어는 오은영 박사에게 가서 수백만원을 주고 받거나, 집에서 알아서 하면 된다. 더불어 오은영 박사 역시 특수한 아이를 치료하는 방식을 육아의 상식이자 진리인 것처럼 퍼뜨리는 걸 멈춰야 한다. 우리 금쪽이는 이 부분이 힘들었을 거예요, 우리 금쪽이는 예민해서 그런 거예요. 따위의 변명은 필요 없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 예민한 아이를 감당하는 건 또래 친구들의 몫이 아니며 사회의 몫이 아니다. '내 아이가 예민하니 너네가 이해하라'는 궤변이 어딨는가. 예민하든 말든 결국 사회 속에서 살아갈 게 아닌가.

지켜야 할 규칙은 그 애의 감정이 어떻든 지키도록 가르쳐야 하는 게 학교의 역할이다. 그 지도권한은 교사에게 보장되어야 하고 학부모는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든 수업 시간엔 조용히 함으로써 친구들을 방해하지 말아야 하고, 교사가 정당한 지도를 했을 땐 따라야 한다. 그래야 다른 '보통의' 아이들도 행복과 안정감을 보장받고 건강히 성장할 수 있다.

오은영 박사가 늘 말하는, '알고 보면 너무 불쌍한 금쪽이'들의 방만한 자유를 보장하는 동안

그 옆에서 숨죽이고 앉아 모든 걸 양보하고 감내하고 있는 평범한 아이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는 건지, 죄송하지만 멱살이라도 잡고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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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기자 다른기사보기